유어스테이지 칼럼 역사의교훈: 어제와오늘
[역사의교훈: 어제와오늘] 경복궁 창건의 주역(主役)들
조선 건국 2년 만에 개경에서 급하게 천도한 한양에는 고려 남경(南京) 때의 연흥전(延興殿)이라는 아주 작고 초라한 행궁이 북악산 밑(현재의 청와대 인근)에 있었을 뿐 임금이 거처할 왕궁은 아직 마련되지 않은 상태였다. 따라서 조정(朝廷)은 태조 이성계(李成桂)가 거처할 새로운 왕궁을 세우기 위해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는데, 12만 평이 넘는 방대한 규모의 경복궁(景福宮)은 정도전(鄭道傳), 심덕부(沈德符), 김사행(金師幸) 등 세 사람의 협업에 의해 10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기적적으로 완성되었다.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 이성계(李成桂)와 정도전(鄭道傳)의 관계는 흡사 중국의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방(劉邦)과 그의 참모 장량(張良)에 비유되는데, 이것은 유방이 장량을 이용해 한나라를 세운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한나라를 건국했다는 중국 황실의 비사를 말하는데, 정도전 역시 이성계를 내세워 자신이 원하는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것이며, 조선 건국의 실질적인 기획자는 곧 정도전(鄭道傳)이라는 뜻이다. 이성계는 신궁(神弓)이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무예에 뛰어난 무장이었지만, 그가 조선을 창업하기 위해서는 국가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략(政略)과 국정 설계에 대한 지략(智略) 등을 겸비한 책사(策士)의 도움이 있어야만 가능했고, 그런 역할을 펼친 인물이 바로 정도전이었다. 결국 조선은 무장(武將) 이성계와 지략가(智略家) 정도전이 함께 건국한 동업국가(同業國家)와 다름없었다.
 
건국 초기 정도전은 임금인 태조 이성계의 상징적 권위를 한껏 드높이기 위해 경복궁의 창건에 최선을 다하였는데, 스스로 경복궁의 위치와 방향 및 규모를 정하고 궁궐 공사를 진두지휘하였으며, 경복궁(景福宮)의 명칭은 물론 궁궐 내의 모든 전각(殿閣)과 궁문(宮門) 등의 이름을 직접 지어 현판을 붙이게 하였다. 결국, 경복궁은 정도전이 창건하여 태조 이성계에게 헌정(獻呈)한 ‘정도전(鄭道傳)의 궁궐(宮闕)’이었다.
 
경복궁 창건의 두 번째 주역은 정도전의 기획에 맞추어 경기도에서 9천 5백여 명, 충청도에서 5천 5백여 명 등 1만 오천여 명의 인부를 공역(公役)으로 동원하여 궁궐의 수많은 전각과 행각, 수목과 물길 등 궁궐 조경, 궁성과 궁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건축한 현장 공사감독 심덕부(沈德符)를 들 수 있다. 심덕부의 다섯째 아들 심온(沈溫)은 세종 임금의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의 아버지이고, 여섯째 아들인 심종(沈淙)은 태조의 사위가 되는 등 왕실과의 혼인을 통하여 큰 가문으로 성장하였다.
 
경복궁에서 만나는 아름답고 수려한 건물들을 최초로 설계(設計)하고 시공(施工)한 사람은 뜻밖에도 천민(賤民) 출신의 내시 김사행(金師行)이라는 인물이다. 경기도 어느 관아의 관노비 아들로 태어난 김사행은 10살을 넘긴 시기에 중국 원(元)나라의 조공 요구에 따라 환관(宦官)으로 차출되어 거세(去勢)한 후 원나라 황실의 내시(內侍)가 되었다. 처음 김사행은 원나라 황실의 전연사(典涓司–궁궐을 수리 보수하거나 청소하는 기관)에 배치되어 공사(工事) 심부름을 하며 성장하다가 차츰 전각(殿閣)을 수리하거나 황궁 내 토목공사에 참여하게 되면서 건축 공사에 대해 비범한 재주를 보이는 건축 기술자로 성장하였다. 
 
환관 김사행은 당시 원나라 황실의 공주였던 노국공주(魯國公主)를 보살피며 수발하는 일을 병행하였는데, 마침 노국공주가 고려의 공민왕(恭愍王)과 결혼하면서 고려로 돌아오게 되자 김사행 역시 함께 귀국하게 된다. 귀국 후 공민왕의 신임으로 환관들의 최고위직인 판내시부사(判內侍府事)에 발탁된 김사행은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손발이 되어 왕실을 이끄는 집사장으로 활동한다. 특히 독실한 불교도인 김사행은 고려왕실에서 추진하는 대규모 왕실전용 사찰(寺刹)공사를 전담하였는데, 이때 궁궐 전각과 대형 사찰을 조합한 특유의 건축기법을 개발하였고, 경복궁을 창건하는 데 있어 김사행을 능가하는 장인(匠人)은 조선 천지에 찾아볼 수 없게 되자 자연 그가 발탁되어 경복궁을 설계(設計)하게 되었으며, 그의 시공(施工)으로 경복궁은 창건될 수 있었다.
 
정도전의 국정 설계에 반기를 든 사람은 이성계의 5남 이방원(李芳遠-후에 태종)이었으니, 역사적으로 권력의 2인자는 존재하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이방원은 ‘왕자의 난’을 일으켜 경복궁의 주인인 아버지 이성계를 몰아냈고, 경복궁의 다음 주인으로 책봉되었던 이복동생인 왕세자 의안대군(宜安大君-이방석)을 살해하였으며, 경복궁을 세운 정도전(鄭道傳)과 그의 추종 인물인 건축 설계사 김사행(金師行) 등 경복궁 창건의 주역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정도전의 궁궐’이라 일컬어지는 경복궁을 폐쇄해 버린다.
 
태종(太宗)은 정적(政敵)의 궁궐인 경복궁을 대신할 창덕궁(昌德宮)을 새로이 창건하였는데, 새 궁궐의 건설 책임자는 아이러니하게도 태종에게 죽임을 당한 내시 김사행(金師行)의 수제자인 또 다른 내시 박자청(朴子靑)이었다. 건축과 토목기술을 김사행에게 전수받은 박자청은 스승인 김사행이 태종에게 죽음을 당하자 궁궐 건축의 독보적 존재로 부상하였고, 새 궁궐(창덕궁)을 지어야 하는 태종에게 박자청은 없어서는 안 될 인물이 되었다. 박자청은 내시의 신분임에도 태종의 심복이 되어 육조(六曹)의 하나인 공조(工曹)의 판서(지금의 장관급)에 올라 큰 영화를 누리는 입지전적인 인물이 된다.
 
경복궁 건설의 전설적 현장 감독 심덕부(沈德符)는 왕자의 난에도 용케 생명을 부지하였는데, 그의 아들 심온(沈溫)이 큰딸인 소헌왕후(昭憲王后) 심 씨를 태종의 셋째 아들 세종에게 시집 보내고 승승장구하며 영의정(領議政)에 오르는 등 왕실의 외척으로서 가문이 크게 성공하는 듯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심덕부(沈德符)와 심온(沈溫) 부자의 가문이 정도전의 일파였음을 잊지 않고 있다가, 외척(外戚)을 배격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심온을 사사(賜死)하고 그의 가문을 멸문지화(滅門之禍)의 지경으로 몰아붙인다. 
 
경복궁 창건의 주역인 정도전(鄭道傳), 심덕부(沈德符), 김사행(金師行) 등을 포함한 관련 인물들은 결국 반(反) 경복궁 세력인 이방원(李芳遠-태종) 일파에 의해 모조리 죽임을 당하면서 짧은 경복궁 시대는 속절없이 끝이 나고, 15대 광해군(光海君) 이후 새롭게 축조된 ‘동궐(東闕) 창덕궁(昌德宮)’과 ‘서궐(西闕) 경희궁(慶熙宮)’ 시대가 길게 열리게 된다.
 
조선(朝鮮)이 개창되면서 왕조의 법궁(法宮)으로서 거대하게 자태를 뽐내던 경복궁(景福宮)은 세종(世宗) 재위 8년부터 시작하여 불과 25년여의 짧은 전성기를 보내고는 결국 다른 궁궐들에 법궁의 지위를 빼앗긴 채 지리멸렬하다가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인해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린다. 오히려 당시보다는 현대에 와서 역사적 법궁으로서 대접을 받고 있으니 그나마 천만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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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스테이지 칼럼니스트 일조
태평양화학, 태평양패션 등에서 30여 년간 근무하면서 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유산을 알리는 '역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또한 여러 단체를 대상으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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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김상연 4월23일 오후 5:45
역사는 승자의 입장에서 쓰여졌다지만, 그래도 역사의식이 깨어 있어야 민도가 높아지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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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23일 오후 9:24
그렇습니다. 역사를 통해 자신의 행위를 판별할 수 있을테니까요. 공감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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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4월19일 오전 7:15
저는 정말 역사에 대해 알아야 하는 걸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아는 역사는 제가 전주이씨라서 딱 조선시대가 전부거든요.ㅎㅎ 그래서 오늘도 열심히 읽고 갑니다. 물론 다시한번 더 읽어야 할 것 같지만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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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19일 오전 9:07
역사는 이러면 되고, 저러면 않되는 것을 알려주는 지표 같은 것이지요. 특히 역사교훈의 귀결은 겸손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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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몽 4월18일 오후 8:02
저는 무지 막지하게 무식해서 잘 모르는대요, 흥선 대원군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비록 말이 좋아 왕손이지 사실 별 볼일은 없는 사람이잔아요. 사도세자의 이름없는 소실의 아들에 아들 인가 아들의 손자인가
하다는데 왕의 피는 병아리 피 만큼 같은대 생각은 왕손 다웠던것 같아요.
몸을 낮출때를 알앗던 사람이라 특별해 보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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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19일 오전 9:04
난세에 태어난 영웅 같은 사람이지요. 그러나 국내외 정세의 변화에는 무감각했던 고집스러운 인물이기도 하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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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 4월18일 오전 11:45
현대에 경복궁이 법궁으로 대접을 받고 우리가 자랑할 수 있는 장소가 되었는데
임진왜란이후 273년간 방치되었다가 고종때 왕권강화를 위해 중창된 것은
흥선대원군의 안목과 리더쉽 덕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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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18일 오후 1:41
맞습니다. 중건에 무리는 있었지만 흥선대원군 덕이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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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덕 4월18일 오전 10:13
박자청이 창덕궁을 창건하였군요. 내시가 판서까지 한 경우는 우리나라에선 극히
드문 일이었겠네요. 시니어에게 큰 교훈을 줍니다. 박자청과 같이 기술을 가지고
있으면 일자리가 있다는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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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18일 오후 1:40
경복궁은 한국인에게 고향 같은 곳이지요.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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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호 4월18일 오전 10:05
궁궐 내 건물의 이름에도 백성을 생각하는 숭고한 뜻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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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4월18일 오후 1:40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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