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어스테이지 칼럼 문화유산 순례
[문화유산 순례] 여주 단종 어수정(端宗 御水井)
1455년 6월 초의 경복궁 경회루. 이곳에서 단종은 강압을 못 이겨 옥새를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전수하고 왕위에서 물러난다. 불과 12세의 어린 몸으로 왕위를 계승하여 재위 3년 만에 숙부 수양대군(首陽大君)에게 왕위를 찬탈당하고 그것도 부족하여 2년 후인 1457년 12월 30일 영월에서 자살을 강요당하다가 끝내는 죽임을 당해야 했던 단종.
 
금지옥엽 지존의 몸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등되어 강원도 영월로 가는 유배 길에 하늘에 사무치는 한(恨)과 단장(斷腸)의 아픔을 안은 채, 각박한 운명을 탄식하며 목을 축였다는 샘물이 바로 여주시 대신면 상구리 야산 기슭에 자리한 단종 어수정(端宗 御水井)이다. 끊어지는 아픔과 천추의 한이 맺힌 이 단종 어수정은 5백 년 넘는 긴 세월 속에서도 비탄에 찬 어린 왕의 피눈물처럼 지금도 변함없이 옥수(玉水)를 토해내고 있었다.
 
[단종 어수정(端宗 御水井). 지름 3.3m, 깊이 2.25m. 여주시 향토유적 제11호]
 
나이 어린 단종은 부인과 헤어져 먼 길을 떠나면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결국은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을 나선 것이지만, 아마 단종은 언젠가는 돌아오리라 굳게 믿고 있었을 것이다. 그 길에서 마셨다는 샘물 하나. 여흥동에서 여주대교를 지나 양평 쪽으로 30여 리, 꼬불꼬불한 소로를 따라 들어가면 주변의 산세가 아름답기만 하다. 지금은 여주 ‘블루헤런 골프장’ 부지에 편입되어 골프장 경내의 코스 옆에서 볼 수 있다.
 
지름 3.3m, 깊이 2.25m, 둘레가 10여m가량의 작은 샘이지만, 바위틈에서 솟아 나오는 옥수는 물맛이 좋고 약수로도 유명해 이 물을 마시러 일부러 찾아오는 사람도 많다고 하는데, 지금도 이 샘물이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는 것은 우물이 놓여있는 산세(山勢)가 모나지 않고 유연하여 주위의 정기(精氣)가 이 샘으로 모여들기 때문이 아닐까! 
 
남한강을 따라 이포(梨浦)나루를 지난 단종은 여주 파사성(婆娑城)을 거친 후 좁은 산길로 접어들었을 것이며, 이곳 상구리 어수정(御水井)에서 타는 목을 축인 후에 원주를 거쳐 영월로 길을 잡았을 것이다. 아마도 정(情)이 많은 단종은 이 샘에서 자신이 물을 마시기보다는 걷는 사람들을 위해 행렬을 멈추었는지도 모른다. 고개를 넘느라 목이 탔을 텐데 산속 호젓한 곳에서 만난 샘물이 행렬의 누구인들 반갑지 않았겠는가? 
 
이곳에서 사람들은 단종에게 먼저 물을 떠다 올렸을 것이고, 그때부터 이 샘은 '단종 어수정(御水井)' 으로 불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이 물을 마시면서 어린 단종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유배(流配)에서 돌아오는 날, 다시 이 샘에서 목을 축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까? 그러나 그렇게 샘물을 마시고 떠난 단종은 다시는 이 길을 돌아오지 못했다.
 
단종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고달산(高達山)을 넘어 영월읍에서 1km쯤 떨어진 청령포(淸泠浦)에 유배되었다. 단종의 유배 길은 7백 리길, 280㎞의 멀고 먼 길이었다. 자신의 운명이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이 길이 이렛날(7일)이나 걸렸으니 내내 그의 가슴속은 희뿌옇다 못해 검게 타 버렸을 것이요, 만 가지 상념과 긴 두려움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광나루와 여주 이포나루를 거쳐 원통고개를 넘다 보니 단종을 호송하던 일행은 숨이 턱에 찰 지경이었을 텐데, 때마침 산길 언저리에 작은 샘물이 눈에 띄니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갈증을 식히던 그 샘물이 바로 단종 어수정(端宗 御水井)으로 지금도 여전히 맑은 물이 찰랑댄다.
 
창덕궁 수강궁을 출발한 단종은 영월로 가기 위해 영이별다리(永渡橋)를 건넜는데, 정순왕후 송 씨는 동묘 앞을 지나서 이 다리까지 따라와 서로 영원한 이별을 해야만 했다. 남편을 알 수 없는 오지로 보낸 송 씨는 동대문 밖에 초막을 짓고 끼니를 연명할 거리가 없어 걸식까지 하며 비참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정순왕후를 동정한 부녀자들이 끼니때마다 푸성귀를 가져다주곤 했는데, 궁(宮)에서 이를 못 하게 말리자 왕비가 사는 초막 근처에 여자들만 드나드는 시장을 열어 물건을 사는 척 모여들어서는 왕비에게 먹거리를 헌상하는 ‘금남(禁男)의 시장’이 동대문 밖에 들어섰다고 유본예(柳本藝-유득공의 아들, 정조 때 검서관을 지냈다)가 쓴 ‘한경지략(漢京識略)’에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몇 달 뒤, 남편이 영월에서 죽었다는 비보(悲報)가 전해지자 왕비는 자신이 살고 있던 초막에서 가장 가까운 봉우리에 올라가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며 통곡을 했다. 단종의 죽음은 정순왕후의 단 한 가닥 남은 희망이 완전히 소멸되었음을 뜻하는 동시에 그녀의 신분이 일국의 국모에서 노비 신세로 전락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왕비는 단종이 죽은 후 머리를 깎고 정업원(淨業院)의 비구니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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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어스테이지 칼럼니스트 일조
태평양화학, 태평양패션 등에서 30여 년간 근무하면서 임원을 역임했다. 현재는 우리나라 역사와 문화유산을 알리는 '역사 해설가'로 활동 중이다. 또한 여러 단체를 대상으로 '스토리텔링을 바탕으로 한 역사'를 강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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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유혜경 11월7일 오전 11:00
지금까지 우물이 마르지않았다니 정말 신기하고 단종과 정순왕후의 이야기에 가슴이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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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효일 11월7일 오후 4:46
오랜만이네요. 반갑습니다. 방문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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