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갑산 꽃무릇
 
 
도리암직한 줄 알았다. 자잘한 들꽃처럼 나붓하게 엎드린 줄 알았다. 바로 앞에서 보니 푸새 밭에 다리가 길찍한 아이가 덜름한 치마를 입고 옹기종기 선 모습이다. 난초와 비슷한 꽃대에 물방울이 똑똑 떨어져 가을 향기가 고인다. 달랑달랑 매달린 물방울 속에는 꽃이 지천이다. 내려올 때 여우비가 몇 차례 내린 덕에 꽃의 미세한 세계를 염탐하는 호사를 한다.
 
나이가 들수록 ‘껄껄걸’ 하며 후회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좀 더 참을 걸, 즐길 걸, 베풀 걸이다. 산 따라 물 따라 자연을 벗 삼아 즐기노라면 세상살이 지혜도 찾을 수 있으므로 허투루 들을 말이 아니라, 나에게는 아포리즘 적 의미로 작용한다. 어머니가 레테의 강을 건너시고 나자 우울하여 밤마다 사모곡을 부르며 뒤챌 때다. 속히 일상으로 돌아가길 희원하던 중에 불갑산 꽃무릇 축제를 보러 가자는 제안이 나오자 ‘고고씽’을 외친 것이다. 
 
 
꽃 덮이는 여섯 조각으로 좁고 길게 갈라진 채 뒤로 돌돌 말려 속을 훤히 내보인 모습이 발칙하다. 암술은 하나, 수술 여섯 개가 꽃 밖으로 길면서도 당돌하게 뻗어 나왔다. 언뜻 보면 발정 난 고양이처럼 아귀찬 괴성이 튀어나올 것 같기도 하고, 바람난 호랑나비처럼 어지럽도록 화려하기도 하다. 너무 화려해서 슬퍼 보이는 꽃. 너무 화려해서 빨리지는 꽃. 우후죽순처럼 피었다가 어느 날 순식간에 지고 마는 꽃. 야생의 아름다움이 더 빛이 나는 꽃이다. 
 
땅속에 몸을 숨겼다가 가을에 화들짝 꽃대를 밀어 올리며 꽃을 피우는 신비로운 식물이다. 대개의 식물이 열매 맺을 채비로 잠시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꽃이다. 뿌리의 알로이드 성분은 방부제 역할을 하여 절에서는 불교 경전을 만들 때와 탱화를 그릴 때 천에 바르면 오래 보존할 수 있어서 사찰 근처에 많이 심은 것 같다. 구월 중순이 되어야 피어났다가 꽃이 지고 나서야 잎이 돋아 그 상태로 눈 속에서 겨울을 난다. 꽃은 잎을 그리워하고, 잎은 꽃을 그리워하면서 끝내 만나지 못한다고 해서 일부에서는 상사화라고도 한다. 상사화는 잎이 좀 넓고 크며 꽃 색깔도 연보라색이지만, 이 꽃도 화엽불상견(花葉不相見)이니 그렇게 부르는 것 같다.
 
 
반야월 작사 유행가로 널리 알려진 ‘울고 넘는 박달재’가 있다. 박달과 금봉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깃든 박달재. 이 또한 얼마나 애달픈 그리움인가. 중국 춘추시대 송나라 강왕은 미인에 대한 욕심이 많아서 시종 한빙의 아내 하 씨를 강제로 후궁으로 삼았다. 한빙이 억울하여 목숨을 끊자, 하 씨 역시 “한빙과 합장해 달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심술이 난 강왕은 무덤을 서로 떨어지게 했다. 결국 무덤 끝에서 나무가 생겨 위로는 가지가 서로 엉키고 아래로는 뿌리가 맞닿아 송나라 사람들은 이 나무를 상사수(相思樹)라고 했다. 연리지가 두 남녀의 결합을 상징하는 말이라면, 상사병은 결합하지 못하고 끝없이 그리워해야만 하는 처지를 상징하는 것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진도 출신의 시인이 걸쭉하게 진도 아리랑을 선소리꾼이 되어 중모리 두 장단을 메기면 일행이 중모리 두 장단을 받았다. 육자배기토리로 되어 있어서 어깨가 들썩거릴 정도로 흥겹다. 진도 아리랑의 유래는 정혼한 임을 기다리던 여인이 문턱에 앉은 채로 늙어버렸다는 연유로 남자 행실을 푸념하고 있는 가사가 많다. 
 
저 건너 저 가시나 어푸러져라/ 일쌔나 주는때끼 보두마나 보자/ 정든 임 오신다기에 꾀 벗고 잤더니/ 문풍지 바람에 고뿔만 들었네!/ 앞산에 딱따구리는 참나무 구멍도 뚫는데/ 우리 집 멍텅구리는 뚫린 구멍도 못 찾네!/ 삼당 개 바닷물은 썰다가도 지는데/ 한 번 가신 우리 님은 다시 올 줄 모른다/ 으름덩굴 열매는 응크레등크레하는데/ 나는 언제 임을 만나 응크레등크레 할거나/ 아리 아리랑 스리스리랑 아라리가 났네 / 아리랑 응응응 아라리가 났네/ (곱고 그리운 님/ 곱고 그리운 님/ (상사병이 나도록) 사무치게 그리워라.)
 
후반의 ‘응응응’ 하고 자못 선정적인 콧소리가 들어가는 것이 이 노래의 매혹적인 추임새라고 할 수 있다. 우리 민족 정서를 대표하는 노래인 ‘아리랑’이 뜻도 모른 채 일천 수백 년을 내려온 것도 이 고대어 속에 현대어로는 치환할 수 없는 절묘한 뜻과 멋이 담겨 있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은 함께하지 않아도 영원하고, 이별을 아는 이가 사랑을 아는 것. 설사 잎이 없는 꽃이 되고 꽃이 없는 잎이 된다 하여도 그리워하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평생을 만나지 못할 임을 기다리다 가신 내 어머니의 애절한 그리움이 꽃무릇과 같다는 생각을 하며 잠시 가슴이 먹먹해진다. ‘원수로다. 유교가 원수로다. 혹시나 만날까 기다리다 칠십 당도하여 서린 설화 적어 놓고 가니 잘 살피시소······.’ 어머니가 아버지께 써 둔 편지 첫 문장이다. 꽃무릇의 육즙이 이런 빛일까. 생살을 찢는 핏빛이다. 한국전쟁의 소용돌이 후에 소식을 모르는 아버지를 애타게 기다리던 중 칠순 때인 이십여 년 전에 써 둔 이 유서를 앞에 놓고 죄인 삼 남매는 가슴을 쳤다. 꽃무릇 같은 생을 살고 가신 어머니! 하늘나라 꽃자리에서는 오매불망 그리던 임을 만나 ‘아리 아리랑 스리 스리랑’ 어깨춤을 추는 영롱한 별로 반짝이기를 빌어 본다.  
 

<시니어리포터 이용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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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리포터 이용훈
까치 한 마리 / 담장위 서 있구나 / 홍시 아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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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황수현 9월17일 오후 10:08
상사화를 어쩜 이리도 절묘한 그리움으로 심어 놓으셨는지요... 시린 가슴에 붉게 꽃물이 드는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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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7일 오후 10:19
안녕하세요? 황 선생님의 일본 역사에 대한 수준높은 글 잘 읽었었습니다. 요즘 글이 뜸해서 기다려집니다. 부모에게 잘못한 자식일수록 새록새록 가슴이 더 저려오지요. 관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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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경남 9월17일 오후 8:15
진도 아리랑 아주 많이 들어봤지만 저렇게 가사가 재미있는 줄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재미있게 글을 잘 쓰셨는지 지금 컴타 치면서 내 얼굴엔 웃음이 가득합니다.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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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7일 오후 9:29
ㅎㅎㅎ. 버스 안에서 진도 아리랑 불러제키면 버스가 뒤집어집니다. 특히 그 소리꾼은 독신자라는 것이 더 재미있습니다. 시도 잘 쓰고 노래도 잘하고 아주 재주가 많고 당당한 싱글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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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옥석 9월14일 오전 9:08
상사화 꽃무룻속에 피어나는 아련한 000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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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4일 오전 10:37
늘 고맙습니다. 윤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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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란 9월13일 오후 11:26
꽃무릇만 보면 가슴 한 켠이 시리시겠군요.
아픈 기억에 너무 깊게 베이지 마시고 부디 청아한 가을하늘로 그 자리를 메워보시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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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4일 오전 10:37
네,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따스함을 남기시는 그 손길에 시린 가슴이 뎁혀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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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자 9월13일 오후 10:10
화려한 상사화인 꽃무룻속에서 어머님에 대한 그리움을 읽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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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10:24
이 글을 쓰고나서 꽃무릇만 생각하면 코가 시큰하네요. 이미 레테의 강을 건너신 어머니를 그리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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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혜경 9월13일 오후 9:36
어젠가 선운사에서 막 피기 시작할 때 보았던 꽃무릇의 붉은 색이 불갑산 꽃무릇을 보면서 떠오릅니다.
어머니의 편지 첫 문장에 가슴이 먹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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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10:21
선운사에도 꽃무릇이 많이 있지요? 사찰 근처에 꽃무릇이 많더라구요. 잎이 없이 꽃대만 덜름한 꽃무릇을 보면서 가슴 한 켠에 늘 아릿한 아픔으로 남아있는 어머니가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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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필 9월13일 오후 6:10
꽃무릇 그 아름다움에 눈앞이 아뜩해져 그 좋은 글이 그만 보이지 않네요. ㅠㅠ, 또 그 현란한 사진 기술이라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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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6:17
아이쿠! 아직 손도 자유롭지 못하실텐데 댓글 남기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그 힘든 손길에 온 마음이 따뜻해집니다. 이 좋은 가을에 쾌차하신 보람으로 날개를 다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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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현순 9월13일 오후 4:46
아름다운 꽃 무릇만큼이나 마음이 절여오네요 .그리고 좀 더 참을 걸, 즐길 걸, 베풀 걸이란 좋은 말도 가지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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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6:03
네, 이런 공간에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니 참으로 친근감이 생깁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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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9월13일 오후 12:02
붉은꽃이 가슴아프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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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4:10
이 좋은 가을 날 붉은 꽃으로 하여금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군요. 같이 가슴 아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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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지영 9월13일 오전 11:29
불갑산 꽃무릇 잘 보았습니다. 아픈 마음이 있어 아쉽게 보입니다. 아픈 마음은 모두 털어버리고 좋은 일만 있기를 기원합니다. 잘 보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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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4:08
네, 홍선생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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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9월13일 오전 10:45
꽃무릇...!
화려한 것일수록 내면의 아픔을 포장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으니 더욱 슬픕니다. 어머님께서 꿈에도 그리운 낭군님께 보내셨다는 편지가 가슴을 울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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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4:07
오늘 이 꽃무릇 때문에 여러분에게 아프고 슬픈 기운을 남겨 민망하네요. 공감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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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종옥 9월13일 오전 9:53
부부불상견(夫婦不相見). 아픈 사연에 가슴이 울컥합니다. 만나지 못한 고통과 만나는 고통이 상존(常存)하는 인생입니다. 후자는 피하면 고통을 줄일 수 있지만 전자는 해결책이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어깨춤에 신명 난 별이 오늘도 이 선생님 앞길을 훤히 비추고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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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후 4:05
이 지구촌에 지정학적 요소와 분단의 아픔과 이념의 차이로 고통받는 나라가 몇이겠습니까만,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에서 평생을 못 보고 사시는 부모님 세대가 참으로 안타깝지요. 저의 아픈 사연에 울컥해 주시고 덕담까지 주신 유종옥 선생님! 따뜻하고 소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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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원 9월13일 오전 8:59
몇년전 들렸던 불갑사와 꽃무릇이 눈에 선합니다.
잘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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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전 9:35
반갑습니다. 불갑사에 가 보셔서 꽃무릇이 더욱 생생하게 기억되시겠습니다. 참 대단하죠?
같은 곳을 보시고 공감해 주셔서 뿌듯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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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9월13일 오전 8:30
화려함이 한가득입니다. 꽂들이 전하는 전설은 하나같이 슬픈으로 점철되어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멋진 사진과 더불어 좋은 글 감상 잘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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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훈 9월13일 오전 8:44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뵙겠어요. 요즘은 곳곳에 꽃 축제가 많아서 세상이 참 아름답습니다. 우리나라가 처한 지정학적 불안을 조금이나마 덜어주니 다행이지요. 관심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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