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년 남성들의 미식, 문학 여행-영국 편
 
남자들의 여행은 어떨까? 그것도 삶을 지긋하게 살아온 남성들의 속내를 여행은 어루만져줄 수 있을까? 그들이 마음을 털어내는 방법은 여성들과 많이 다를까? 남자가 되어보지 못한 나는 은근히 이 영화에 대한 기대가 많았다. 중년 남자들의 여행은 왠지 출발부터 그 느낌이 독특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영화 전에 한 편이 더 있었다. 이탈리아 편이다. 물론 주인공도 같고 흥행 면에선 전편이 훨씬 높은 결과를 기록했다. <트립 투 잉글랜드(The Trip, 2015. 11 개봉)>가 오리지널이라면 몇 달 먼저 상영된 이탈리아 편은 시즌 2, 속편인 셈이다. 그런데 영화도 다 제가 가진 운이 있기 마련인 모양이다. 이탈리아 편이 앞서 개봉되는 바람에 몇 달 차이로 오리지널이 밀렸다. 그도 그럴 것이 비슷한 컨셉의 영화를 한 해에 두 편이나 걸었으니 그 피해는 나중에 개봉한 영화가 뒤집어쓸 밖에. 그리고 올해 세 편째인 스페인 편이 제작되었다. 스페인 편은 아직 우리나라에 개봉되지 않았다.
 
 
영국 북부가 여행지의 무대인 <트립 투 잉글랜드>는 비록 운은 불리하게 작용했어도 내용 면에선 영국에 대한 의외의 신선함을 심어준 수준 높은 영화다. 나는 일부러 앞서 상영된 이탈리아 편을 보지 않았다. 비교되는 것도 있겠지만 영국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매력을 영화를 보기 전부터 다른 나라와 경쟁하듯 마음에 담고 보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탈리아와 스페인에 비해 영국은 의외로 알려진 것이 없다. 더구나 영국 북부에 대해선 특별히 여행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선 음식도, 유명 관광지도, 그들의 생활 습관도 거의 상식이 전무한 터라 많은 걸 알지 않고 본다는 기대감이 특히 좋았다. 
 
<옵저버> 매거진의 제안으로 영국 북부 최고의 레스토랑을 순례하는 여행을 떠나게 된 중년 남성, 스티브(스티브 쿠건)와 롭(롭 브라이든). 한물간 배우이자 십년지기 친구, 그러나 은근한 라이벌 의식을 가진 두 사람의 호흡은 생각보다 잘 맞았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모습까지, 중년의 남자들이 꽤 귀엽다.
 
 
영국의 전설적인 캐릭터 '앨런 파트리지'의 스티브 쿠건은 배우이자 제작자, 각색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그런가 하면, 롭 브라이든은 대영제국 훈장을 받은 영국 대표 코미디 배우이니 두 사람의 조화는 떼 놓은 당상이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실제이고 어디가 연기인지 모를 만큼 두 사람은 자연스럽고 자유로운 연기를 보인다. 그러나 미국식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영국식 농담이나 표현은 아직 좀 낯선 게 사실이다. 그러니 공감 면에선 약하지만 시트콤을 연상케 하는 이들의 능란한 연기는 누가 뭐래도 최고다.    
                  
이탈리아 편과 마찬가지로 이들은 6일 동안 6개의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영국의 대표 시인인 윌리엄 워즈워드의 흔적을 따라가며 예술과 사랑, 인생을 논한다. '폭풍의 언덕'을 연상케 하는 영국 북부의 드넓은 자연 속에서 이들이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하고도 다른 만큼 서로 나눌 이야기도 많다. 그런가 하면 앤소니 홉킨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마이클 케인 등 굵직한 할리우드 스타들의 성대모사를 펼치는 롭의 재치와 스티브의 코믹하면서도 다양한 표정은 그들의 수다를 한층 맛깔나게 만든다. 대체 누가 남자들이 과묵하다 했을까. 신은 남자에게 과묵함을 준 것이 아니라 여자들의 능숙한 수다에 밀려 잠시 침묵하는 법만 빌려준 게 틀림없었다.  
 
 
그러나 두 남자는 각자 살아온 그들의 일상에 지쳤다. 중년이라는 나이가 특별한 보상 없이 받아들이기엔 만만치 않듯이, 그들에게 벌어진 행과 불행의 연속은 다양한 흔적을 남겼다. 빛을 프리즘을 통해 분광시키면 무지개 색 연속 띠가 보이듯이 그들은 가슴속 기대와 불안 사이의 보이지 않는 무지개를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삶은 누구의 삶이더라도 그리 녹록지 않다. 다 이루었나 하면 해결되지 않은 과제가 뒷전에서 밀려나오고 그 과제들에 허덕이다 보니 어느새 훌쩍 인생의 후반기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영화는 미식, 문학, 예술을 위주로 여행하는 컨셉이다. 그런데 영국의 음식은 그다지 좋은 평을 받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오죽하면 영국인들에게 인기가 좋은 윈스턴 처칠도 "대영제국은 전 세계에 갖가지 먹거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단, 조리 전으로 말이죠."라는 말을 남겼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감독은 두 배우에게 음식에 대해서도 논하기를 요구했는데 둘은 문학 이야기에 주로 몰입했다고 한다. 물론 내가 보기엔 여섯 군데의 식당에서 나오는 음식 모두 훌륭해 보였다.
 
 
"Trip Maketh Man! (여행이 사람을 만든다!)" 무엇보다 영화를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트립 투 이탈리아>와 마찬가지로 문학, 영화, 미술에 관한 일정 수준의 사전지식이 요구된다. 더구나 <트립 투 잉글랜드>는 극적 긴장을 유도하는 사건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완만한 흐름이어서 문화적인 지식이 없는 사람들은 지루하고 재미없는 영화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윈터버텀 감독과 스티브 쿠건의 고향이기도 한 '레이크 디스트릭트'는 영국에서 '걷기의 심장과 영혼'으로 불릴 만큼 호수와 산이 함께 빚어내는 절경으로 유명하다. 스티브도 영화 속에서 "윌리엄 터너의 풍경화 같아"라는 말로 감탄을 표한다. 뿐만 아니라, 스티브와 롭은 유럽 낭만주의의 기폭제 역할을 한 랭커셔 지방과 '신이 내린 땅'이라 찬사받은 요크셔 데일즈 등을 방문해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광을 만끽하며 워즈워드와 콜리지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워즈워드의 생가인 '도브 코티지'는 영국인들에게 꾸준히 사랑받는 휴양지 중 하나인 윈드미어 호수와 주변 풍경이 한눈에 보인다. "살아있는 건 기쁨이었지만 젊다는 건 천국 그 자체였다." 스티브는 워즈워드의 시 한 구절을 읊으며 여행에 낭만의 기운을 더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또 이들은 워즈워드의 절친이자 시인, 평론가로 유명한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가 묵었던 '그레타 홀'에도 들러 또 다른 영국 평론가 윌리엄 해즐릿이 콜리지에 대해 평한 것을 읽으며 함께 탐구하기도 한다.      
 
이들은 묘한 자존심 싸움도 벌이지만 여행이라는 여정이 그렇듯이 또 금세 화해하며 하나가 된다. 두 사람 모두 부인이 있지만 다른 여성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그러나 결국 돌아와도 반겨줄 이 없는 자의 여행의 끝은 다시 시작되는 고독의 일상일까. 마음대로 이뤄지지 않는 인생에 대한 두 중년 남성의 회의와 반성은 아련한 연민과 공감을 불러일으키면서 그들의 웃음이 남기는 여운이 길다.
 
마이클 윈터버텀 감독의 이 영화는 수수한 듯 일상적이면서도 남자들의 삶을 한 번 더 들여다보게 하는 영화다. 그러나 어디 그것이 남자들만의 삶이겠는가. 결국엔 '우리 모두'라는 이름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기에 영화의 시도는 여행에서 시작되어 인생으로 귀결되는 느낌이다. 110분 정도의 러닝타임은 그들의 인생 이야기와 더불어 영국 북부의 풍광을 진하게 남겼다.
 
 
"네 나이에 그러는 거 힘들지 않아?" 
 
"마흔 넘어가면 모든 게 고단해." 
 
두 사람의 대화에서 풉, 하고 웃음이 터졌다. 아직도 방년 18세처럼 젊음을 강조하는 여자들보다 조금은 솔직하다는 생각에서다. 물론 영국이라고 하면 만인이 워즈워드부터 떠올리게 되지만 영화는 문학부터 예술까지 생각보다도 훨씬 다양하고 전문적이어서 겉으로는 다소 엉성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가 과연 고단하게 느껴지면 어쩌나 라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영화는 한 나라의 지역 문화를 설명하면서 동시에 인텔리 계층의 중년 남성들이 담아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잘 버무려 담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즘 인기를 얻으며 방송되는 TV N의 모 프로그램과 그 성격이 묘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일주일에 한 지역을 여행해 그곳의 역사와 문화, 음식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중년 남성들의 수다라니, 어쩜 이렇게 흡사할 수가!
 
어느 프로그램이 어느 프로그램의 컨셉을 빌려왔는지는 몰라도 그 신선한 구도는 확실히 차별적이라 할 만하다.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놀란 부분이 남자들도 거침없는 수다를 떨며 먹는 걸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비교적 과묵한 편이셔서 나는 남자들의 수다에 대해 그다지 익숙지 않다. 물론 그 또한 이성에 대한 고정관념이었다는 걸 나중에 알게 됐지만 더구나 나이 먹은 남자들이 문학에 대해, 예술에 대해, 자신의 인생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고민하는 장면은 나로선 정말 새로운 땅이라도 발견한 듯한 놀라운 충격이었다. 
 
물론 익숙지 않다는 것은 그만큼 좋지도 않다는 걸 의미할 수밖에 없어서 자꾸만 어색한 웃음이 삐져나왔고 그만큼 영화의 재미로 치부하기도 했는데 그렇게 신기하지 않은 듯 신기한 경험은 역시 영화라는 장르를 통해서가 제격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마흔이 넘으면 모든 게 고단하다면서 수다는 그칠 줄 모르고 이어가다니. 눈으로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주인공들의 수다만큼 영국 북부에 대해 많이 알게 된 계기가 되기도 해서 이 시리즈는 그냥 눈만 즐거워지는 영화가 아니라 즐거움 가운데 지식과 상식도 채울 수 있는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걸 얻고 많이 걸어다닌 듯한 영화다. 그런 점에서 조만간 이태리 편도 찾아보고 싶고, 스페인 편도 빠른 시일 내에 수입되기를 기다리고 싶다. 이탈리아 편은 영국 편보다 음식이 차지하는 부분이 좀 더 화려하고 스페인 편은 아무래도 스페인의 대표적인 인물, 돈키호테와 산초가 등장할 것만 같다.
 
그러나 여전히 두 남성의 인생은 해결되지 않은 채 여운을 남긴다. 원래 인생의 무게가 그러하니 적당히 체념해야 할까? 내 인생의 무게도, 스티브와 롭의 여정도 아득하기만 하다. 울지 않는 청년은 야만인이요, 웃지 않는 노인은 바보라고 했던가. 가시에 찔리며 모은 장미꽃들이 언젠가는 우리의 여정에 향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시니어리포터 이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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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리포터 이영란 (레드)
그것은 한 움큼의 빛이었다. 설악 능선에 내리던 눈발, 내가 목격한 환희의 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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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이승필 12월7일 오후 8:37
여행하면서 티격태격 입씨름을 하는 건 걱정할 일이 아니랍니다. 이미 서로의 안으로 깊이 들어와 있다는 증거이니까요. '울지 않는 청년은 야만이요, 웃지 않는 노인은 바보라고요?' 좋아요. 웃을게요. 하하하, 이렇게 호탕하게 웃으면 그 무엇이 달라지는지는 모르지만요. 레드님! 아무튼 대단 참 대단하단 말밖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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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옥희 12월7일 오후 5:44
요즘은 여행이 대세인 세상이지요.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 없다면 집떠나 고생하는 생각밖에 안 날 듯해요. 이런 여행 하고 싶어요...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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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 12월7일 오후 12:37
늘 좋은 책과 영화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석해주신 내용으로 또 한번 감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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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덕 12월7일 오전 11:21
전 언제나 영란씨의 평이 영화나 책보다 낫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 영화평을 보면서도 제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영국 여행은 대륙의 유럽국가들에 비해 덜하는 것 같습니다. 그건 아마도 영국의 문화
유산이 적어서가 아니라 섬나라익 때문에 다른나라와 함께 여행하기가 조금 번거롭기 때문일거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유럽에 몇년 살았지만 영국은 딱 한번 가봤을 뿐입니다.

원래 음식문화가 발달한 나라는 강한 국가가 아니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영국을 대표하는 음식이래야 샌드위치,
미국을 대표하는 음식은 핸버거인데, 이 둘은 일을 하면서도 먹을 수 있다는 공통점이 있지요. 요리로 유명한 프랑스는
영국과의 대결에서 거의 밀렸지요. 또한 중국요리도 유명하지만, 몽골과 청나라에게 통치를 넘겨 준 적이 있었죠.

저는 중년이 좀 넘었지만 이제 여행을 한다면 음식과 문화예술 여행을 하고 싶습니다. 영란씨가 소개하는 이 영화는
전 보지 못했지만 제가 보고싶어 하는 내용인 것 같아서 보고 싶습니다.

글이 상당히 깁니다. 손은 어떠세요? 문화서핑만 하지 마시고 병원서핑을 열심히 해서 손 아픈 것 빨리 해결하시길
바랍니다. 아픈 손으로 글을 쓴다는건 많이 힘들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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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12월7일 오전 9:53
한편의 영화 속에 다양한 색채의 문화를 담아내면서 이야기를 끌고 간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작업입니다. 더구나 종합예술인 영화는 비교적 일반적인 대중을 상대로 먹고 자라나는 분야여서 자칫 외면 당하기도 쉬운데. 감독이 말하고자하는 의지의 중심을 잃지 않고 고집하는 영화가 그래도 매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소개되는 영화는 영란님의 솜씨로 더욱 빛나서 입맛이 확 당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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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길 12월7일 오전 9:20
여행과 힐링. 중년의 로망이 다 담겨있는 영화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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