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연휴에 나무늘보가 되어 뒹굴뒹굴 시체놀이 하다가 막걸리 홀짝거리며 프리미어에 올라 온 ‘당신 거기 있어 줄래요’라는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과거로 돌아갈 기회가 열 번이나 생긴 남자는 삼십 년 전으로 돌아가 젊은 자신을 만납니다.
 
내게 이런 일이 생긴다면 어느 시간으로 돌아갈까? 한 번은 틀림없이 그날일 것입니다. 요즘 아이들에게는 낯선 단어가 되어버린 국민학교(초등학교) 때. 교회에서 연극을 했던 크리스마스이브 그날입니다.  ‘왜 하필 내가 거지야.’ 실로암 연못에서 눈을 뜨게 되는 눈먼 거지 소녀 역할이 주어졌을 때 정말로 내가 거지가 된 것 같아서 하기 싫다고 울었는데 성가대도 함께 맡았던 젊은 선생님은 작고 마른 네가 역할에 잘 맞아서라고 무엇보다 노래를 제일 잘해서라고 나를 설득했습니다. 
 
마지못해 억지로 연습에 들어가고 분량이 많아 혼자 남았던 어느 날 목사님 딸이라 사택에 살았던 한 학년 후배가 “언니는 좋겠다. 주인공이라서.” 하면서 진짜 부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샐쭉하며 말했는데 교회 사택에 살던 그 아이가 나를 부러워한다는 걸 안 그날 거지 소녀는 비로소 내 안으로 온전히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연극을 하는 날이 가까워지면서 당시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던 엄마에게 연극을 하니 꼭 와달라고 말했던 거지 소녀는 무대에서 실눈을 뜬 채 노래를 하면서도 마음은 온통 오지 않는 엄마를 기다리며 어둠 저편 굳게 닫힌 문가를 향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거지 소녀가 눈을 뜨게 될 즈음 예배당 뒤편 문이 열리더니 환영처럼 빛을 등지고 한 사람이 들어왔어요. 거지 소녀의 아버지, 바로 내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자리에 앉지도 않고 뒷벽에 기대서서 낡은 끈으로 허리를 잘록하게 동여매고 나무지팡이에 의지한 무대 위 거지 소녀를 바라보았는데 무대 위 사람들은 지금 막 거지 소녀에게 일어난 기적을 놀라워하며 춤과 노래로 예수님을 찬양하고 있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무대에서 내려왔을 때 아버지는 보이지 않았어요.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지금 생각하니 이상한 일이지만 집으로 돌아온 후에 아버지와 나는 약속이나 한 듯 서로에게 묻지 않았습니다. 수십 년이 지나 절대로 뽑히지 않을 느티나무처럼 크고 푸르게만 느껴지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후유증이 생겨 더 이상 푸르지 않게 되었을 때 참지 못한 거지 소녀가 물었습니다.
 
“아버지. 나 크리스마스 연극했을 때 거기 왔었지?”
“그래.”
 
힘없고 어눌한 말투였지만 분명히 아버지는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간절한 바람이나 상상이 만들어 낸 환영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는 그날 딸의 연극을 보곤 끝나자마자 가버린 것이었습니다. 예배당 뒤편에 기대서서 무대 위에서 노래하는 딸의 모습만 보고 가 버린 아버지. 
 
나는 알약 하나를 삼켜 그 날로 돌아가 아버지가 외롭지 않게 옆에 나란히 기대어 서서 무대 위 거지 소녀를 응원하고 싶습니다. 연극이 끝나면 그날 급히 돌아나갔을 아버지의 팔짱을 끼고 아버지의 애인이 되어 조금 허름한 선술집에 마주 앉아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텁텁한 막걸릿잔을 채워드리고 싶습니다. 더 시간이 주어진다면 아버지의 힘겨운 시간을 들어드리고 싶습니다. 젊디젊은 아버지를 꼭 안아드리고 힘내시라고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시니어리포터 정용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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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리포터 정용자
꿈꾸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나날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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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유혜경 1월15일 오후 2:21
다시 돌아가고 싶은 시절은 별로 없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돌아갈 수 있다면
엄마 돌아가시기 딱 사흘 전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엄마에게 다정한 딸이 되어서 맛난 밥 지어드리고 싶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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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5일 오후 2:24
마음이 울컥해지는 말씀입니다.ㅠ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시간이라..
선생님 오늘은 많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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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경 1월15일 오후 1:38
세월을 돌리고 싶다고 후회하지 말고 오늘 이 순간 최선을 다해서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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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5일 오후 1:40
좋은 생각입니다. 이 시간도 결국 지나버리니까요.
응원합니다~ 선생님 항상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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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길 1월15일 오전 10:55
따뜻한 동화 한 편을 읽은 듯 합니다. 나는 어느 시절이 화양연화였는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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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5일 오후 1:34
고맙습니다 선생님 오늘 더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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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라 1월14일 오후 4:56
연극을 보고 아무도 몰래 가버리신 아버지의 뒷모습에 마음이 찡하네요 그것이 부모의 마음이 아닐까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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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4일 오후 5:12
늘 젊은 아버지의 그 모습이 눈에 아른거립니다.
막걸리를 즐겨 드시던 호탕하신 아버지의 모습과 겹쳐서요. 고맙습니다 선생님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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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1월14일 오후 4:25
아버님의 눈길이 머문 교회 연극무대가 아름답게 크로즈엎 되어 먹먹해집니다. 저는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고 싶을까 생각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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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4일 오후 4:28
고맙습니다. 추억은 돌아갈 수 없어 늘 그립고 아쉬운 듯 합니다. 선생님 따뜻하고 기쁜 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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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몽 1월14일 오전 9:24
다시 돌아 간다면 75년 3월달로 가고 싶습니다..병원 침대에서 마지막 숨을 내려놓고 떠나가신 아버지를
의사선생님들을 협박하거나 사정해서라도 아버지를 떠나지 않게 하고 싶습니다.
그 날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나를 42년동안 원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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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용자 1월14일 오전 9:57
우리가 원하는 시간으로 단 한 번만이라도 돌아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지난 시간은 늘 그리움과 후회로 남는 것 같습니다. 선생님은 분명 최선을 다했을겁니다! 생과 사를 우리가 어찌 정하겠어요. 그만 원망을 내려놓으시고 편하셨으면 합니다. 더 많이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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