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치한 대화
 
불이 난 냉난방기의 실외기 라인을 고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든다고 해서 수리를 포기하고 며칠을 난로만으로 버텼더니 다친 팔이 욱신거리는데 장난이 아니었다. 얼음 속에 팔을 집어넣고 치켜들고 있는 느낌(?)이었다. 견디질 못하고 회사 고객센터 서비스 담당자와 담판을 벌여 겨우 10만 원에 해결했다.
 
그 와중에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는지 무기력과 우울의 늪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 불편한 몸과 지친 마음으로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상처는 더욱 깊어진다. 상상할 수도 없는 월세와 권리금을 요구하는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그런 돈을 들여 장사를 시작하신 분들의 배포와 강단에 존경과 찬탄을!
 
나도 20년 전 이 가게에 들어올 때 전 주인에게 1,500만 원의 시설비를 주고 왔다. 그간 건물주로부터 싼 월세의 혜택을 충분히 받았으니 나가라고 하면 빈손으로 그만두는 게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젠 조금 억울해해야 할 것 같다.
 
몇 날 며칠을 가게 알아보러 다니며 심란해하는 나에게 남편은 번번이 초를 친다. 그만두고 집에서 쉬라는 것이다. 아파트 대출금을 비롯한 각종 공과금과 고정 지출을 합하면 200만 원쯤 되는데 자신의 월급만으로 감당이 될 거라고 믿는 순진무구한 발상이다. 남편의 월급에서 200을 뺀 나머지로 먹고산다면 극빈층 수준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다.
 
남편은 이제 깡순이한테도 돈이 안 들어가니까 충분히 커버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데 내 계산으로는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친구들에게 밥값 한 번 못 내고 친척들 경조사도 철저히 외면하고 산다면 가능할 것 같긴 한데 난 그렇게 살기 싫다. 자식에게 손 벌리기는 더욱 싫고 벌어 쓸 수 있을 때까지 움직이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허공으로 사라질 권리금이나 터무니없는 월세에 투자하고 싶지는 않다.
 
가게를 알아보러 다니면서 자괴감에 시달리는 중이다. 함께 가게를 보러 다니는 깨순이가 월세와 시설비로 갈수록 눈에 띄게 우울해지는 내 표정을 읽고는 "엄마, 돈 없어서 속상해?" 하고 묻는다. "응. 평생 일하며 돈 벌었는데 이렇게 가난해서 제대로 된 가게 하나 얻을 돈도 없다는 게 슬퍼." "엄마는 나 같은 딸이 있는데도 가난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럼 나를 수백억이랑 바꾸자면 어떡할래?"
 
쓸쓸하게 웃다가 단호한 말투로 "절대 안 바꾸지!" 하는 엄마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그래도 약간은 갈등하지 않을까? 혹시 수천억, 조 단위라면?" 하며 확인하려는 깨순. 비로소 기운을 내며 내가 그랬다. "수천억에, 송혜교 얼굴까지 얹어준다고 해도 안 바꿔!" 때로는 유치한 대화가 우울감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끈이 돼주기도 한다. 
 
수천억, 수조의 돈에 보너스로 송혜교 얼굴까지 준다고 해도 안 바꾼다는 대단한 가치를 지닌 자신에 대한 만족감으로 의기양양해진 깨순을 보며 기분이 풀렸으니 말이다. 지난 3월 1일은 깨순의 생일이었다. 워낙 심란했던 터라 겨우 미역국만 끓여주고는 그냥 넘겼다. 진짜 비싼 딸인데.
 

<시니어리포터 장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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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리포터 장명신 (춘심이 혹은 삼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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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이호연 3월16일 오전 5:08
사업의 어려운 모습이 느껴집니다. 힘내십시오. 현실을 극복하지 ㅗㅅ하면 미래는 예약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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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4월3일 오후 1:10
이제 옮길 가게를 계약하고 인테리어 중이랍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다 위로하고 걱정해주신 님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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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자 3월13일 오후 11:07
만약에 딸이 유괴되어 유괴범이 몇억을 요구했는데 부모라면 돈을 주겠느냐는 말에 어느 엄마는 안주겠다고 하더라구요.... 세상에 ... 그 말에 모두 놀란적이 있습니다. ...가정이지만, 오손도손 깨순이 깡순이 가족이 때로는 부러운 생각이듭니다. 행복한 가정이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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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15
그런 일이 생기면 전 돈이 없어서 못줘요. 그래서 결코 생기지 말아야.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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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라 3월13일 오후 7:52
가게를 옮기시려고 하시는군요 많이 힘드시겠어요 그래도 수억보다 더 귀한 따님이 곁에 계시니 든든하시지요
어딘가에 장명신님에게 맞는 가게가 나올거에요 팔도 아프신데 무리하지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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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16
가게 계약했어요. 다 이렇게 빌어주신 덕분이에요. 진짜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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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갑환 3월13일 오후 3:35
가게를 옮기시는군요. 좋은 쪽으로 잘 옮기셨으면 좋겠네요. 그런데 깨순이는 낑순이는 따님이신 가요.이름이 참 재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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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18
큰애를 깡순. 작은애를 깨순으로 부른답니다. 애들은 제가 자기들을 이런 이름으로 쓰고 있는지 몰라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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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식 3월13일 오후 3:31
딸이있으신분들 좋겠어요, 저는 목메달아들만둘인데 그나마 막내아들이 딸노릇을 하려고 애는 쓰는데...딸만갔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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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19
하하. 딸같은 아들. 우리 세대의 로망이네요. 전 둘째가 아들같은 딸이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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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경 3월13일 오전 10:56
이렇게 예쁜 자식들 보면서 고생을 다 잊게 되는거지요.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고마운 존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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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20
그런데 아쉬운 것이...둘째가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어요. 오로지 저 앞에서만 이쁜 짓을 하네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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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춘몽 3월13일 오전 9:46
저도 딸 하나가 있는대요? 저는 내딸 몸뚱이만한 다이아를 줘도 바꾸지 않는다고 떠들고 있지만,,,,
ㅋㅋㅋ 그렇지요. ,, 때로는 밉고 화나게 하지만 세상 무엇하고도 바꿀수 없는것이 가족 이겠지요. 가족 중에서도
자식 말이에요. 사실 남편, 자식은 다시 만들수 있지만 부모는 무엇으로라도 다시 만날수 없는데 병들고 나이든 가난한 부모는 "짐 덩이라고 하는것 같지요. 어제 어떤 강연에서 그러더라구요. 부모하고 함께
살고 싶다는 자식이1.2프로 뿐 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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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명신 3월14일 오전 11:22
저도 엄마한테 말도 못하게 나쁜 딸이었어요. 그래서 울 딸들이 나중에 서운하게 굴어도 받아들일 각오가 돼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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