핑크뮬리와 추억 속의 핑크 호수
 
내가 핑크뮬리라는 꽃을 처음 본 건 유어스테이지 '사진 이야기' 난에서였다. 첫눈엔 분홍이라는 색깔 하나만 다를 뿐 영락없는 '분홍빛 억새'구나 라는 것이 소회의 전부였다. 생각은 그런데도 점점 더 그 꽃을 본 인상이 강해지고 있는 걸 거부할 수 없었다. 일찍이 그 정도로 내 마음을 송두리째 내준 전례가 없었다고 하면 내 느낌의 흔들림이 짐작되고도 남을 것이다.
 
오래전 하늘공원(상암동 월드컵공원) 정상에 가까워질 즈음, TV를 통해 보던 바로 그 길엔 만개한 하얀 억새들로 장관을 이루곤 했다. 초로의 여인 머리칼 같은 억새를 보려고 먼 지방에서까지 많은 사람이 몰려오다니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불과 몇 년 사이 주변의 언덕이며 야산이 핑크뮬리의 군락지로 감쪽같이 변해버린 것이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였다.
 
10년이면 몰라보게 달라진다는 세상이 이토록 실감나게 눈앞에 벌어지다니 놀라웠다. 하늘공원 핑크뮬리의 분홍빛에서는 스무 살 적 떫고 시큼한 풋사랑 소녀의 눈물을 담은 담홍색이 느껴졌다. 비스듬한 언덕 둘레와 들판을 빈틈없이 차지하며 일렁이고 있는 자분홍빛 꽃물결 앞에 서서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광경이 나에게만 유독 황홀하고 신기하다면 다분히 모순 아닌가.  
 
일찍이 대부분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핑크뮬리를 나는 반 발짝 늦게서야 알게 된 것이다. 꽃 사랑이 유별난 나이고 보니 꽃에 미안해지는 느낌이었다. 문득 떠오른 것이 15~6년 전 서호주 여행길에서 본 핑크 호수다. 책장을 열고 서호주 편이라고 적힌 앨범을 뒤적거리자 물빛이 핑크뮬리와 아주 흡사한 핑크 호수가 바로 모습을 드러냈다. 서울에서 장장 아홉 시간 비행 끝에 도착한 호주 브리즈번. 거기서 유일한 교통편인 버스로 목적지까지 꽤 오래 걸린 기억이 생생했다. 멀고 먼 그 길은 내 머릿속을 온통 핑크 호수 하나로 꽉 채웠다.
 
 
우리가 다녀온 얼마 뒤, 여행 마니아들에게 서호주가 주목받으면서 핑크 호수가 유명세를 탔다. 호주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절경을 배경으로 한 호수가 우리를 반겼던 기억도 새롭게 되살아났다. 시간의 흐름을 잊은 듯이 일행을 현혹시키며 호수는 독특한 물빛에서 우리의 시선을 고정시키고 말았다. 호수 물의 분홍 빛깔은 바로 곁에 푸른 바다와 대비되어 더욱 선명할 뿐 아니라 반짝거렸다. 모든 여행객에게 영감을 줄 정도로 핑크 호수가 환상적으로 다가오는 순간 호수의 배경이 되는 기암괴석들 또한 장관이었다.   
 
핑크 호수의 이름은 힐러 호수(Lake Hillier)다. 퍼스에서 남동쪽으로 700km가량 떨어진 에스페란스(Esperance) 앞바다의 러쉐어쉐이 군도를 이루는 105개 섬 중 가장 큰 섬인 미들 아일랜드에 있는 핑크색 호수이다. 이 호수의 길이는 약 600m로 모래와 페이퍼박 숲, 유칼립투스 나무로 이루어진 울창한 삼림으로 둘러싸여 있다. 누구든지 호수를 보는 순간 탄성을 지르며 딸기 우유를 연상케 되는데 이 호수의 물 빛깔에 대해 과학자들은 소금밭에 사는 박테리아가 생성하는 염료 때문일 것으로 추정한다고 한다.
 
눈앞 호수의 물 빛깔은 보기 좋은 중간쯤의 분홍 색도(色度)가 주는 특징이 자별했다. 어쩌면 물에서 좋은 과일 향이 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신 코를 킁킁거려 보기도 했다. 심장의 박동 소리가 갑자기 커진 것 같았다. 핑크 호수의 분홍 물빛은 아스라이 잊힌 채 가슴 깊이 묻고 돌아선 사모의 정염(情炎)이랄까. 보면 볼수록 농밀한 환희가 아로새겨진 색채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서 와 만져보라는 듯 찰랑찰랑 물결이 커졌다 작아졌다 반복할 때마다 '정말 손가락에 분홍 물이 들까?' 궁금해졌다.
 
이역만리 머나먼, 그것도 순박한 동양인의 전형을 자처하는 우리 부부를 반겨 맞아준 호수의 아름다움을 필설로 다하기엔 솔직히 역부족이다. 포근하고 보드라우며 따스해 보이는 호수를 보며 홀연 몸을 담가보고 싶어지는 상상을 했다. 흐릿한 기억 너머 몇 해 전 우리가 본 신비롭고 아름다운 명 풍경으로 내 마음을 차지하고 있는 핑크 호수. 그것은 꿈이 아니었다. 
 
핑크뮬리와 핑크 호수. 그 둘 사이에 혹시 우리가 알아내지 못할 대단한 비의라도 있는 게 아닐까. 비단 관광객뿐만 아니라 과학자들까지 매료시켜 왔으니 어떻게 보면 비현실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진풍경인 것이다. 핑크뮬리에 혹해 사실 또 한 번 서호주를 여행하고 있는 듯 나는 그 꽃의 매력에 푹 잠겼다. 농담(濃淡)의 차이가 없어 보이는 저 핑크뮬리 곁에 핑크 호수가 함께 있는 그림을 그려본다. 만남은 봄처럼 설레고 만개한 꽃의 향기로 우리를 편안하게 했다. 헤어짐은 기억 속에서만 가능한 필름의 되감기다. 꽃도 호수도 꿈속의 그림이다. 
 

<시니어리포터 이승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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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니어리포터 이승필 (clara)
'우리' 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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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한마디
한미숙 12월6일 오후 7:18
핑크뮬리의 빛깔을 압축하면 저 핑크호수 색감에 닿을 수는 있을까요? 마치 파렛트에 지금 막 짜놓은 유화물감 같아요. 핑크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둘레의 세피아, 터키즈블루, 코발트블루, 인디고, 울트라마린블루, 화이트의 띠. 핑크호수가 실제 존재한다는 걸 이제 믿을 것 같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블루계통이 다 저 사진 속에 있어서 황홀해지네요. 서호주의 핑크호수, 제 생애 볼 수 있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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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필 12월6일 오후 7:28
과연 핑크를 좋아하는 (아이들 말로) 대마왕이군요. 과학적으로는 정확히 뒷받침할 근거를 아직은 못 찾아냈다고만 듣고 있습니다. 아무튼 괭장한 매력을 지닌 빛갈임엔 틀림없었러요. 핑크뮬리는 제 글 도입부에도 보이듯이 '분홀물을 들인 억새' 같았거든요. 열심히 사셔서 서호주에 가시면 핑크호수가 가디리고 있을 거예요. 그때까지 물에 도다른 기현상이 나타나지 않는 한. 꿈꿀 꿈이 하나 더 생긴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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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송식 12월6일 오후 1:02
그러게요, 저역시 평소에는 무덤덤하게 보았는데 '유어스테이지'덕분(?)에 알게됐죠. 역시 늙을수록 배워야하나봐요, 근데 사진솜씨 일품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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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필 12월6일 오후 6:36
정말 나이들수록 다방면으로 공부가 필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아무렴 사진 솜씨가 이송식님만 하겠어요. 즐기자고 하신 말씀으로 기억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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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현덕 12월6일 오전 10:56
또 선생님한테 한 말씀 들을 것 같습니다. "핑크뮬리"라는 꽃은 처음으로 듣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건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잇다는 사실입니다. 어찌 저는 꽃에 이렇게 무지할까요? 꽃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핑크뮬리와 핑크호수의 모습이 눈 앞에 그려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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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필 12월6일 오전 11:44
무슨 말씀을요. 저도 아주 뒤늦게서야 핑크 큘리를 알았으니 동지인 셈인데...저야 꽃 사랑을 자처하는 입장이기도 하니 그렇다 해도 장쌤에겐 조금은 예사로운 일인데요.

그건 그렇다고 해도 서호주 여행에서 만난 핑크호수는 가능하면 다시 보고 싶은 명화지요. 고마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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